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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뉴스·셀프

Ep.3 — 일의 끝에 남은 냄새, 그게 나였지

by 억수르 2025.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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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를 마친 뒤 방 안에 남는 냄새가 있다.
풀과 종이, 땀과 먼지, 그리고 약간의 희미한 고요.
누군가는 그 냄새를 불쾌하다고 말하지만
나에겐 그게 하루의 흔적이었다.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으며
하얀 벽지에 내 하루를 붙여놓는다.
누가 봐도 같은 흰 벽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흘린 숨이 섞여 있다.
땀방울 하나하나가 벽 속에 박혀,
시간이 지나면 ‘일의 냄새’가 된다.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티가 안 나는데,
나는 왜 계속 이 일을 붙잡고 있지?’
하지만 바로 그때, 새벽 햇살이 벽 위로 부드럽게 번지며
내가 붙인 벽지가 고르게 빛을 받는 걸 봤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아, 이게 나야.”

내 손끝에서 나오는 건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건 누구에게 배운 것도, 흉내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AI가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쌓아도
이 벽 냄새만큼은 따라올 수 없겠지.
사람이 일을 통해 남기는 건 기록이 아니라 ‘감정’이니까.

오늘도 나는 벽지를 붙인다.
누군가의 공간을, 누군가의 하루를.
그리고 그 끝에는 늘 같은 냄새가 남는다.
그건 다름 아닌, 나라는 사람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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