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8 — 이제, 다시 벽 앞에 선다
벽 앞에 다시 선다.이번엔 달랐다.예전처럼 겁이 나지 않았다.손끝엔 여전히 풀이 묻고,바닥엔 도구가 흩어져 있지만이제 그 모든 게 ‘내 세계의 언어’로 느껴진다. 처음 도배를 배울 때만 해도,나는 늘 누군가의 그림자였다.형의 뒤에서, 사장의 지시 속에서,“조금만 더 펴라”, “주름 잡히면 안 된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런데 지금, 벽 앞의 나는그 모든 말을 스스로에게 건넨다.“괜찮아.이 주름도 곧 펴질 거야.”벽은 늘 나를 시험했지만,이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글을 쓰면서 알게 됐다.사람이란 결국 자신을 덧바르는 존재라는 걸.어제의 상처 위에, 오늘의 용기를 덧대고그 위에 내일의 희망을 붙이는 일. 벽지도 사람도,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다만 ‘덮어주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이제 나는 글로도 벽..
2025. 11. 3.
Ep7. 누군가 내 글을 읽었다고 말했을 때
“선생님, 그 글… 참 좋았어요.괜히 울컥했어요.”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나는 손끝이 잠시 멈췄다.그동안 수십 번의 도배보다이 한 문장이 내 마음을 더 깊이 눌렀다.블로그를 시작할 때만 해도그저 기록용이었다.벽지 재질, 공법, 비용, 팁 —정보를 정리하는 게 전부였다.그런데 어느 날,내 글 아래에 달린 댓글 하나가 모든 걸 바꿨다. “요즘 우울했는데,선생님 글 보면서 이상하게 힘이 났어요.” 나는 모니터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내가 쓴 글이,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그날 이후, 글의 목적이 달라졌다.정보 위에 감정을 얹고,감정 위에 사람의 이야기를 쌓았다.그러자 조회수는 줄었지만,메시지는 훨씬 깊어졌다.어느 날은 벽지를 바르다문득 생각했다.“벽도 사람도, 다 닿아야 따뜻해지..
2025. 11. 1.
Ep.3 — 일의 끝에 남은 냄새, 그게 나였지
도배를 마친 뒤 방 안에 남는 냄새가 있다.풀과 종이, 땀과 먼지, 그리고 약간의 희미한 고요.누군가는 그 냄새를 불쾌하다고 말하지만나에겐 그게 하루의 흔적이었다.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으며하얀 벽지에 내 하루를 붙여놓는다.누가 봐도 같은 흰 벽이지만,그 안에는 내가 흘린 숨이 섞여 있다.땀방울 하나하나가 벽 속에 박혀,시간이 지나면 ‘일의 냄새’가 된다.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티가 안 나는데,나는 왜 계속 이 일을 붙잡고 있지?’하지만 바로 그때, 새벽 햇살이 벽 위로 부드럽게 번지며내가 붙인 벽지가 고르게 빛을 받는 걸 봤다.그 순간, 알 수 있었다.“아, 이게 나야.”내 손끝에서 나오는 건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그건 누구에게 배운 것도, 흉내낼 수도 없는 것..
2025. 10. 13.